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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까?


고난 주간 중에 칼럼을 쓰게 돼서 성경 내용을 묵상했습니다. 부활 주일 한 주 전은 종려 주일 입니다. 그리고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지키고 부활 주일을 맞게 됩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길에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세력에게 붙들려 재판 받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게 됩니다. 성경은 빌라도가 예수님께 죽을만한 죄가 없어서 풀어주려고 했으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요구하여, 폭동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원했던 것은 대제사장의 무리들, 즉 유대 종교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압박을 가한 것은 군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풀어줄까 하고 물었을 때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일까, 다른 세력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을 읽어볼 때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일 수도 있고,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두 무리가 합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형 판결시의 무리 역시, 대제사장 세력이 사주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그저 모여든 사람들일 수도 있으며, 두 무리가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때, 특정한 세력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무리’라는 단어는 그저 보통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무리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여론이 예수를 환영했다가, 예수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변화 사이에는 고난 주간의 행적으로 알려진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신 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한 일,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겟세마네에 가서 기도하신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그 동안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많은 무리를 먹이신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유대인의 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며칠을 지내시면서 예수님은 그의 뜻을 제대로 밝히십니다. 잘못된 종교적 관습들을 지적하시고, 믿음을 돈과 권력에 파는 일을 드러내시고, 참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에 로마를 몰아내고 강한 유대인의 나라를 회복할 군사적, 정치적인 왕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제사장 세력의 공격에 무력하게 붙들려 가시고 심문 받으시는 모습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유대인의 나라를 영광의 모습으로 회복할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강한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주변 나라를 제압할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그런 기대에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기대는 분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며칠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가 묵상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사 십자가에 올라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나를 위해 당하신 주님의 고난과 고통 그것이 전부일까요? 나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고통 당하셔서 완성하신 은혜를 받아 누리면 되는 것인가요? 정말 그런가요?


저는 자꾸만 예수를 죽이라는 군중들이 생각나고, 그들을 향한 분노와 함께 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 내게 필요한 일을 허락하시고 나의 욕망을 채워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는 모습이 꼭 그때 그 ‘무리’들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고난 주간이 주님 앞에 그렇게 민망하고, 부끄럽고,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이 불편함을 덮어버리지 않고 주님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금요일까지 괴로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늘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 두고 그럼에도 사랑하시고 받아 주시는 은혜를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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