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사회

2019년 10월 4일 업데이트됨

종교와 사회 (알버타저널에 목회자 칼럼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탁월한 학문성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세상과 교회를 보는 시각은 좀 남다르고 싶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져서 이번은 ‘종교와 사회’라는 주제로 쓰고 두 번째는 ‘종교와 인간’이라는 주제로 쓰겠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인간이 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종교는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시작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고, 자연은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히는지, 나쁜 사람들이 왜 잘 사는지, 사람은 왜 죽는지, 죽은 후엔 어떻게 되는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많이 밝혀지면서 종교가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만이 답할 수 있는 부분, 종교의 본질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종교 자체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이었습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교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는 영적인 면을 담당하고, 사회는 삶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인 사회도 있습니다. 역사와 함께 종교와 사회가 분리 됐다는 관점에서 보면 원시적 사회 구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과 캐나다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사람들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고, 반대로 세상의 현실들은 종교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종교적이며, 동시에 세상을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  종교의 기준은 '진리'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상식'입니다. 진리와 상식은 겹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면은 진리가 상식을 초월하고, 또 상식은 진리에 비해 영향력의 범위가 넓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고, 상식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타협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이지만,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면 상식을 따라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기에 상식과 부딪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것이거나, 상식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상식이 틀리는 경우 보다는 본질이 아닌 것을 진리의 본질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늘 옳은 것이요, 상식은 시대와 지식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정의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현상입니다. 종교가 진리 외적인 부분을 자꾸 진리라고  고집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경전과 법전  종교의 기준이 되는 문서를 '경전 Canon'이라고 합니다. 캐논은 카메라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길이를 재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준이라는 말이죠.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 불교의 경전은 불경입니다. 상식의 경전이 있다면 '법전'일 것입니다. 그 시대 그 사회의 상식을 기준으로 한 옳고 그름을 근거로 법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법전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세상이 법의 정신이 지향하는대로 돌아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법은 법이고 세상 살이와는 좀 차이가 있죠. 그 차이가 작은 사회는 선진 사회고 그 차이가 크면 후진 사회일 것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삶의 터전 캐나다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이 법대로 돌아가지 않듯, 종교의 경전을 따라서 제대로 사는 종교인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제가 목사인 만큼 교회를 생각하면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개독'이라는 말이 있다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참 슬픈 단어입니다.

계약  종교(기독교)와 사회 둘 다 계약이라는 말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농담으로 ‘구원받는 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은 병을 낫게하는 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계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옛 계약과 새 계약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복이 있다는게 구약이고, 스스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 신약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계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기 위한 계약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계약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자연 상태로 살던 인간에서 계약에 의한 사회제도들(원시 부족에서 부터 왕정을 거쳐 공화정)이 생겨나고 사회를 이루어 왔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회 계약'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어떤 형태든 계약에 의해서 권력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계약의 당사자인 권력자와 개인들이 무엇을 주고 받는지의 문제가 정치입니다. 개인은 자유와 노동력과 재산을 희생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체계 즉 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계약이 잘 지켜져서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적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계약을 통해 구원 받은 인생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이상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성향  제가 논문을 쓸 때 주제로 삼고 싶어서 고민했던 것이 있는데, 어째서 같은 종교 안에서 사람들의 성향이 극과 극으로 달리 나타나는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현상을 보면 교회 안에도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근본주의 등 수 많은 주의가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선 결과를 종교별로 분석한 내용이 있어서 유심히 봤습니다. 종교마다 어느 정도 높은 비율을 보이는 후보는 있지만, 한 후보에게 표가 몰리지 않은 것이 이런 현상을 증명합니다.

19대 대선 종교별 통계(방송3사 출구조사 기준)

 그런 고민 끝에 제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종교 이전에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더 막강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은 종교와 관계 없이 나타나고 그래서 한 종교 안에서 신앙적인 성향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차이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나 학력과도 무관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도 무관해 보입니다. 바뀌기가 엄청 어려운 것으로 봐서 가지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것이거나 한번 형성되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교와 정치  고대에는 종교가 곧 정치였습니다. 지금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도 정치도 사람이 사는데 관계된 일이라 겹치기 마련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목회자는 정치 얘기 할 것 없고, 정치는 종교를 건들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엔 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종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저는 정교분리에 동의하는데,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면 안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모든 시대마다 정치는 종교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나라의 종교를 바꾸고 새 종교에게 힘을 주고 국민 통합과 권력 강화의 논리를 생산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합니다. 종교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지만, 종교인은 동시에 사회 구성원 개인으로 정치 활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3장 1절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유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부가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고민입니다.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이니 따라야 하는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에 있는 권세'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권력을 가진 것이 누군가? 그 답은 대통령이나 여당의 정부권력이 아니라 국민이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권력은 선거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도 그 권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거로 권력을 다루고 조정해야 합니다.

종교와 평화  세상 모든 종교는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의 삶이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 그 종교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수많은 테러가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에게 종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 가치가 서로 다르면 갈등하고 원수가 되고 싸우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교분리를 주장한 이유이기도 한데, 권력이 종교로 위장하고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슬람을 표방하는 테러 집단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와 욕망이 얽힌 폭력 집단일 뿐입니다.  건강한 종교라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원수 삼고 싸우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타문화권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기에 종교간의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나라 타문화권의 타종교를 만나는 세상입니다. 캐나다에는 아마 세상의 웬만한 종교는 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편 나누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는 일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몇 가지 일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교분쟁입니다. 명심합시다.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종교는 문화현상이기도 합니다. 내 종교는 내 어머니 아버지처럼 바꿀수 없는 것이지만,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신앙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답은 없고 이소리 했다가 저소리 했다가 했는데, 글의 한 조각이라도 읽어주신 여러분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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