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개인
(알버타저널 목회자 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종교든 사회든 사람의 일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이라 신을 말하는 듯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이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종교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를 위한 것입니다.
개인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 Individual을 번역한 말입니다. Individual은 영어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수를 뜻합니다. 요즘은 개인이 아주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생각되는데,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에서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서양 문화가 개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동양 문화에서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좀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개인이란 실제로는 '나'입니다. 나는 나 외에 다른 개인을 다룰 수 없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개인이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인 나에게 종교는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종교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집단적이 되면 그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가 아닌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 또 어떤 집단의 공유된 가치체계가 종교처럼 작용합니다. 그렇게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처럼 가치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예를 들면 특정 정치인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의 경우 종교와 비슷하게 집단을 형성하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가치를 공유합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유사 종교라는 용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상적인 종교가 아닌 사이비 종교 등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세상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우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권력자와 영웅이 중요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군중일 뿐이었습니다. 고등 종교가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대조차도 개인으로서 인간이 중요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신에게서 부여 받은(이렇게 말하지만 실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권위로 사람들을 다스리던 왕은 신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왕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때에 하나님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신적 권위에 의해서 약하고 억눌리던 개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호 받는 삶을 그렸던 것입니다.
개인인 인간 한명 한명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은 세상에 없던 생각입니다. 종교를 통해서(다른 종교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그 개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흐름이 있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서 보장하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상식이지만, 슬프게도 그 상식이 실제 세상에서는 참 무기력합니다. 세상은 힘(물리력이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현대적인 권력)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누르고 착취합니다. 참으로 징그럽게도 바뀌지 않는 현실입니다. 차별이 상식인 삶은 사람들을 비참하고 슬프게 합니다.
차별에 대한 반대
인간이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은 곧 개인에게 고난을 주는 차별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종교 자체가 기득권이 되어서 종교 특권층 이외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역기능이겠죠.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걷어져야 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핵심에 마틴 루터킹 주니어 목사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차별 반대 운동은 절대가치에서 나온 행동이었기에 위협이나 박해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전래 초기 조선의 신분과 성차별 타파에 앞장선 것도 기독교였습니다. 물론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경우는 더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살아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근본적인 고백을 생각하면 사람의 편견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걷어내야 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박해 받는 소수의 위치에 있을 때는 순기능이 컸고, 교회가 기득권을 갖게 되면 역기능이 드러났습니다. 지금은 교회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순기능을 하는 면도 있고, 역기능이 드러나는 면도 있다고 봅니다. 많은 예들을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느니 보이는 부분들을 고치고 바꿔서 종교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는게 낫겠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 약자들이 온갖 차별아래 신음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의 차별들을 찾아 고쳐가고 세상을 향해 차별의 벽을 걷어내도록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기독교는 인간 존재를 '죄인'이라는 말로 규정합니다. 이 말이 익숙하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나?'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권위를 느끼고서는 그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새번역)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그런 느낌의 죄인이라면 좀 이해가 될까요? 또 다른 면으로 설명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잘못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구원 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하고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고백이며,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의지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초대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바울도 스스로 자신이 '죄인의 우두머리'(디모데전서 1:15 새번역)라고 했거든요.
종교와 윤리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은 1905년에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년 4월 21일~1920년 6월 14일)의 저작인데, 그 내용이 개신교의 영향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술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 합니다. 기술 발전과 그로 인한 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인데, 그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막스 베버가 관찰한 예처럼 정신적인 부분의 변화가 사회를 새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술이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지만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더 중요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종교는 사람에게 절대가치를 형성하고 삶의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 그 종교에 독실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합니다. 종교가 형성하는 가치판단을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윤리가 인류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요. 건강한 종교는 건전한 윤리를 만들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윤리를 만드는 종교는 ‘이단’(異端 다를 이, 끝 단)이나 사이비 종교(似而非宗敎, 비슷한데 아닌)라고 평가 받습니다.
죄의 삶의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삶을 살라는 기독교는 어떤 윤리를 내놓고 있나요?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에 적절한 윤리를 제시하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나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종교 宗敎’는 한자말입니다. ‘마루 종’, ‘가르칠 교’입니다. 종宗자의 뜻은 근원이나 으뜸입니다. 풀어 말하면 세상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 그래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주제로 한다는 말이죠. 가장 중요한 주제란 무엇일까요? 저는 초월적이고 놀랍고 광대한 무엇이라기 보다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움직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말하고, 그래서 그에 맞게 제대로 잘 살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죠. 기독교가 그 역할을 잘 한다면 건강한 종교로 인류와 함께 지속될 것이고,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역사 속에 있었던 종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종교도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갑니다. 발전하고 변화합니다. 본질은 더 갈고 닦아 사람들의 삶을 잘 인도하고, 그 외적인 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대응하여 변화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본질이라고 붙들고 지난 시대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기독교는 사람들에게보다 먼저 하나님에게 버려져 폐기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일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그런 목사일까봐 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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